겨울, 그 기대와 꿈

01 8월 겨울, 그 기대와 꿈

겨울. 그 기억과 기대의 즐거움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여니 눈이 내린다. 올들어 제대로 보는 눈다운 눈이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냉이국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눈오는 날의 냉이국 향기가 더욱 깊은 날이었다. 오후엔 드라이브를 죽산의 도피안사란 사찰까지 가서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어둠도 몰려 오고 피곤도 함께 묻어 몰려온다.
초저녁의 선잠때문 이었을까  자려고 누우니 한동안 잠이 안 온다. 잠을 청하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문득 눈을 감고 있으려니 어린시절의 한 풍경이 너무도 선명히 시야에 나타난다.
초등학교시절 방학이 시작되고 이렇게 눈이 내리고 그 눈이 폭설이라도 내린 날이면 동생과 나는 비닐 비료부대를 하나씩 가지고 사과 저장고를 묻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지금보면 참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 길이의 언덕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한참이나 소리를 치며 내려 오는 착각을 주던 꽤나 스릴이 있던 눈썰매장이었다.
꽤나 오래 그곳에서의 반복된 즐거움이 슬슬 무료해지고 햇살이 처마에 비치며 눈 녹는 낙수물소리가 똑똑 귀로 울려 퍼질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어머니의 “점심들 먹어라!”하는 말씀. 축축해진 바지를 의식하며 집으로 달려 가면 입에 침이 가득 고이는 김치볶음밥이  붉은 불기운이 몽실 몽실 피어나는 화로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알간 고추장을 넣고 김장김치로 화로에 볶아주신 참기름냄새 풀풀 나는 김치볶음밥의 맛은 재생하기 어려운 화석같이 고귀하고도 그리운 그 시절의 정지된 풍경이었다.
그 시절엔 마냥 삶은 이렇게 즐거운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은 영원히 이대로 멈춰선 채 흘러 갈 것만 같았다. 어른들의 피곤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이제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 지금, 그 시절의 그 단순한 즐거움대신 저녁 노을처럼 스며드는 엄숙함이 내게서도 묻어나온다. 가끔은 그렇게 단순하게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어딘가에 던져지고 싶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엔 그저 눈만 바라보며 그 적막을 즐기며 마실도 다니고 산도 오르고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숲도 헤메이고 싶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새벽에 문득 내게 생생히 살아서 다가온 어린시절의 한 장면과 단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 이렇게 아침에 나는 넥타이를 멘 채 제법 근엄한 채 여기 서 있다. 마흔의 중반이 되면 길이 닿는 강원도 산골에 초가를 한 채 사가지고 가끔  충전이 필요하고 눈이 올 것이라는 소식이라도 들을라치면 그곳으로 짚차를 몰고 들어가야겠다. 눈으로 갇힌 다음날 “지금 어디세요. 오늘 약속 있으셨잖아요.”하는 전화가 오면 “응 여기 강원도야. 나 지금 눈 치우고 있어!”하며 살아봐야겠다.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올 겨울 뭔가가 기대되는 겨울이다. 삶은 이래서 재미가 있나 보다.

02.12.09. 오산의 숲에서 김 익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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