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를 키우렵니까? 금강송을 키우렵니까?

01 8월 오동나무를 키우렵니까? 금강송을 키우렵니까?

오동나무를 키우렵니까? 금강송을 키우렵니까?

산길을 오르다보면 잎이 넓고 덩치가 큰 나무가 순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자주 본다. 그 순한 만큼이나 여려서 비바람 스치고 지난 후 그 곳을 지나가다보면 가지 꺾이고 때로 통째로 넘어진 그 나무를 자주 본다. 그 나무는 애상의 상징이다. 옛사람 이씨는 이 나무를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오동나무를 좋아하오니/ 집 앞 뜰에 저녁의 시원함을 바친다” -영오동/이氏-
그렇다 오동이다. 그러나 오동은 그 수명이 30년을 넘지 못하며 그 애상은 애상을 넘어서지 못하니 장롱과 거문고, 관의 재료로 그 쓰임을 다한다. 오동으로는 대들보를 세울 수 없다. 오늘날 쉼 없이 쏟아지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오동나무와 닮았다. 조숙하고 외적으로 크고 그럴듯하나 속으로 비고 결은 조밀하지 않고 쉽게 물러서 쉽게  쓰러지는 재목들. 재목은 재목이나 동량이 될수 없는 재목들. 재주는 넘치나 큰 재목으로는 쓰기 쉽지 않은 세대들, 가볍고 경쾌하나 무거움을 나누기는 어려운 세대들이다.
오늘날의 현상을 들여다 보노라면 옛 시인처럼 애상에 머물고, 문제를 풀기보다는 문제를 먹고사는 공공기관처럼 현상에 머물 수는 없는 심각한 과제가 우리들 앞에 있다.
비바람 맞고 시간이 걸려도 그 결이 거칠어도 천년의 동량이 될 원목을 키우고 싶다. 천년을 버틸 금강송을 키우고 싶다. 아니 키우련다. 요즘 나는 이런 심정으로 청소년 리더십에 공을 들이고 있다. 거친 비바람을 뚫고 뛰어가는 럭비의 철학에서 나는 그 희망을 읽는다. 청소년 리더스 클럽회원을 모집하고 초중등학교에 시범교육을 실시하려는 것은 모두가 원목이 될 수 없지만 소수라도 원목의 가능성이란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흥분된다. 10년 20년뒤 야무진 내면을 가진 그 아이들이 씩씩한 기상과 건장한 외면을 가지고 나보다는 세상을 위하고 시련을 긍정하며 정정당당함의 명예를 지키며 이 세상의 그라운드를 누비는 시대의 희망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이의 장래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오동나무형 인재보다는 금강속의 원목의 인재를 키울 때이다. 내일은 늦을 것이다.

2012년 5월 10일 여명의 경안천에서 김 익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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