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3월 저 봄바람처럼 너무도 상식적인 정치인의 도래를 꿈꾸며
저 봄바람처럼 너무도 상식적인 정치인의 도래를 꿈꾸며
이제 겨울의 한철이 가나보다 지난해 사다가 쟁여 놨던 참나무가 몇토막 안남았다. 지난주는 세차게 눈 내리더니 다음날부터는 봄바람이다. SNS에 정치에 관한 글들이 빈번히 날라오는 것을 보니 드디어 선거의 계절이 돌아온 듯하다. 우주는 빈틈없는 변화의 바퀴를 돌리지만 바쁘지는 않다. 오직 바쁜 것은 인간의 마음뿐이다. 우주는 오진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지난 것에 매달리지 않는데 오직 인간만은 오지 않은 두려움과 지난 것에 집착하여 아둥바둥대다가 사라진다.
인간의 불안이 만드는 좌절과 분노는 정치란 명분을 숙주로 자생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정치는 그런 인간의 불안과 분노에 근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키워가려는 속성이 있다. 한국가가 망하고 국민이 비극을 당하는 상황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그에 앞서 대중의 파괴적 분노와 콤플렉스가 존재하고 그 대중의 분노와 컴플렉스를 악용하고 선동하려는 정치적 선동이 개입하는 패턴을 발견한다. 대중은 그 선동을 통하여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나 그 해소가 끝난 시점에 한 개인의 분노는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하나의 무서운 악마의 형상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는 자신이 제공한 분노를 통하여 성장한 숙주가 자신을 통제하는 무서운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의 나치즘일 것이다.
정치가 희망이 되지 않고 혼란과 갈둥의 근원이 되는 이유는 그 시대의 정치가 일반대중의 어떤 대세적 특성에 기생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일이다.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성숙한 나라일수록 분노보다는 긍정과 희망의 대중에 근거한 희망의 정치가 펼쳐진다. 성숙은 정신적 정서적 차원의 자기관리 프로세스이다. 자기관리의 프로세스가 잘 정비된 대중들이 많은 나라일수록 민도가 높다 할 것이고 그것이 그 사회의 성숙을 가른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분노보다는 희망과 긍정의 댓글이 넘치고 너를 향한 변화의 주창보다는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를 설득하기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너와 나를 가르기보다는 하나의 본질적 통합을 이야기한다.
얼마전 어떤 후보자의 공약이 SNS에 날라 왔기에 그 내용을 살펴보다가 희망의 댓글을 달았다. 우리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주겠다는 공약, 결국은 우리세금 가지고 선심 쓰겠다는 내용의 난무였다. 거기에 어떤 자신의 건강한 철학을 기반으로 한 맥락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글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보다는 나부터 변화하겠다는 스웨덴 국회의원같은 그런 국회의원의 약속이면 더 좋겠네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보좌관도 없고 100% 국회의사일정에 참석하고 좁은 집무실에서 빵을 먹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출장시도 일반석에 탑승하여 가는 오직 국민을 위하여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봉사의 미션에 철두철미한, 미션의 흥분감보다는 당연한 상식으로 살아가는 스웨덴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우리 정치인들이 언제가 성숙해졌을 때 보일 그림이었다. 우리나라 국회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3선의 올레 토렐 스웨덴 국회의원은 우리나라 국회를 돌아본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국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나 봅니다. 그렇게 큰 리무진을 타고 좋은 사무실, 공짜로 기차를 타고 했더라면 우리국민들은 엄청난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봄이 오는 계절 한바탕 소란스런 공언들이 난무한 정치의 계절이 왔다. 성숙한 국민은 성숙한 정치인들을 낳는다. 세상을 변화시켜주겠다는 선심보다는 나부터 변화하겠다는 그런 정치인들이 넘치는 사회를 기다려본다.
2016년 3월 4일
하카 김익철 올림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