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8월 천년전의 그대로 아직도 우리는
천년전의 그대로 아직도 우리는
천년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럼을 주고 있는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전의 되풀이다.
-박재삼, 천년의 바람中에서-
석가탄신일을 잘보내셨나요. 석탄일 아침, 아들과 함께 남한산성 암자로 맛있는 비빔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텃밭에 잠시 들러 무럭무럭 자라는 고추랑 상추랑 옥수수를 살폈습니다.
바람이 좋아 아들과 개울가 벚나무에 해먹을 걸고 잠시 눈을 감었다 깨어 보니 점심이 흘쩍 지나갔습니다. 바람만이 옆에서 살랑거립니다. 그윽한 평안이 밀려옵니다. 석가탄신일 비빔밤 먹는 시간도 다 지나가고 그저 그 평안함에 팔랑거리는 나뭇잎의 재롱에 취합니다. 뻥 뚫린 하늘의 무심함에 취합니다.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이 순간의 충만에 취합니다. 본래의 충만에 취합니다. 부처가 산에만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놓아진 그 순간에 그 님의 마음이 온전히 들어오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지난 토요일에 대학생들과 땡볕에서 럭비를 한 영향이 오래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이 석가탄신일 아침의 숲속의 쾌면이란 선물을 준듯합니다. 나이는 못 속입니다.
불교가 현대인류에게 준 선물은 자기 존재의 긍정적 자각과 인과적 영향의 주체인식입니다. 천년전의 소나무를 휘몰아치는 바람이 지금도 되풀이 되듯이 그러나 삶은 여전히 혼돈과 욕망과 분노 속에서 무한반복의 흐름 속을 흘러갑니다. 잠시라도 영향의 주체자로서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말과 자신의 얼굴을 관조하지 않으면 이 놈은 그저 정신없이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노를 쥔 자가 당신입니다라고 석가는 지혜를 알려주지만 노를 젓지 않는 한 배는 그저 그 욕망과 분노의 무질서로 떠내려갈 뿐입니다.
분노에 찬 사회,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너를 탓하는 즐거움에 빠진 사회, 그 영혼은 그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져 나옵니다. 성형으로 인조인간화된 감각적 얼굴들은 넘치지만 되볼아보게되는 향기품은 아름다운 얼굴은 그 어떤 성형의 인조인간고수라도 만들지 못합니다. 얼굴을 얼의 꼴이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파괴적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 치고 밝고 해맑고 단정한 기운을 읽을 수 없다는 하나의 공통점. 얼이 오염된 얼굴들은 우리들에게 저렇게 살지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숲속의 단잠은 저의 무질서한 영혼을 잠시나마 편안하고 맑은 기색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 순간에 분노도 탐욕도 혼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부처의 시간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밖에서 찾지 마라. 각자 자기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었으면 좋겠다.”
인간사 시끄러워도 천지는 고요한 이 5월에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깊은 호흡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적과도 같이 그 순간에 얼굴을 본래의 자기 진면목으로 돌아옵니다.
오늘도 내일도 맑은 영혼의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2015년 5월 26일
남한산성자락에서 하카 김 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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